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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대중교통이 있지만, 택시는 뭔가 좀 다르다.
이 좁은 공간의 낯섦은 금세 친숙함으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어서 소설같은 에피소드들이 얼마든 생길 만하다.
이 속에서 오가는 대화들로 인간과 인간이 이어지고, 이는 또 다시 더 넓은 범주를 에워싸 인간 세상의 온갖 문제를 은유할 수도 있게 된다.

<지상의 밤 Night on Earth,1991>

짐 자무쉬의 7~8번째 정도 작품인 이 아기자기한 영화는.. 지구 위에 있는 다섯 개의 도시 속을 돌아다니는 택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같은 밤 같은 시각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의 택시 다섯 대는 기사와 승객을 만나게 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는데,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주는 섬세한 재미에 몰입해 따라가다 보면 120분이 지나 버린다.
영화가 끝나고 얼마 지나면 이 사사로운 에피소드들이 얼마나 큰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는지를 불현듯 떠올리게 된다.
'짐 자무쉬' 감독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커다란 의미를 간소한 얘기들로 풀어냄으로써 관객에게 생각의 선택권을 준다는 점인데 자무쉬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다.
자무쉬가 그리는 인생들은.. 보는 사람, 보는 상황에 따라 가벼이 즐길 수도, 심오하게 곱씹을 수도 있게 아주 오묘한 깊이로 표현되고 있다는거다.

<지상의 밤> 역시 위트 넘치는 에피소드와 배우 면면의 매력에 압도돼 키득대며 가볍게 즐기지만, 이 재미난 얘기들이 젊은이의 삶, 이민 문제, 인종과 장애인의 문제, 가족문제 등 사회의 다양한 얘깃거리를 대표하고 있음에 생각이 미치게 되면 갑작스레 놀랍다.

그럼 지구 위 다섯개 도시를 떠도는 범상챦은 기사양반들과 그보다 더한 승객들을 한번 보자.
같은날 같은 때의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

1st episode

이런 차림으로 택시를 모는 위노나 라이더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실제로 '위노나 라이더'라는 이름에 이끌려 이 영화를 보게 된 사람들도 많고, 나 역시 아직 자무쉬를 눈여겨 보지 않은 때에 이 영화를 봤다면 그건 위노나 때문이었겠지.
암튼 깜찍하게 껄렁하니 담배를 쉼없이 피워대는 조그맣고 비쩍 마른 위노나를 한번보면 잊을 수 없다.

이런↑ 위노나와는 전혀 매치가 안되는 ;;; 

그리고 또 한명의 반가운 얼굴은 승객으로 등장하는 '지나 롤랜즈'이다.
<오프닝나이트>, <글로리아>, <영향아래의 여자>와 같은 예전 영화들이 훨씬 좋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최근까지도 꽤 여러 영화에 잦은 등장을 해주니 반갑다.
몇 년 전에 <스켈리톤 키>라는 이상한 호러물에서 늙은 모습을 다시 봤을 때 그녀가 맞나 하고 눈을 의심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아줌마가 세월을 이기진 못한 모습이어서 어쩌면 더욱 반가웠다고 하면 이상한가..

이 둘은 좁은 택시 안에서 이렇게 물리적 거리를 넓혔다 좁혔다 하며 교감한다.
역시나 담배는 줄줄이로 피워대면서.

연예인의 매니저인 '빅토리아(지나 롤랜즈)'는 '코키(위노나 라이더)'를 배우로 캐스팅 하려 제안하지만, 이 은근히 직업정신 투철한 택시기사 소녀는 일을 사랑한다며 주저없이 사양해버린다.
뒤돌아 바로 떠나버리는 택시와 함께 첫번째 에피소드는 끝나버리는데, 그때 잠깐 이 껄렁하기만 한줄 알았던 젊은 처자의 직업관에 대해 조금은 심각하게 생각할 만한 시간이 약 10초 정도 주어짐을 느끼게 된다. ^^

2nd episode

뉴욕의 밤 10시

'요요'는 도무지 서주지 않는 택시들을 향해 돈을 흔들어대며 애쓰고 있고...
여느 택시들과는 조금 다른 낡은 택시가 덜컹거리며 선다.
운전을 '할줄 모른다'고 해야할 만한 이민자가.. 모습만으로도 짠하게 기사로 앉아있고.. 기어를 D에 놓지 못해 출발도 제대로 못한다.
생각해낸 방법은... 바.꿔.앉.는.거.였다.
자리와 역할을 바꿈으로써 또 하나의 교감이 생긴다. 영어도 서툰 이 독일 이민자(헬무트)와, 미국인이지만 택시의 환영조차 받지 못하는 어쩌면 비슷한 처지의 이 흑인(요요)은, 비슷한 스타일의 모자, 독특한 발음의 이름, 서커스 같은 자그마한 소재로 대화의 사슬을 자연스레 꿰어간다.

갑자기 중간에 앉게 되는 저 아줌마는 요요의 형수인데.. 놀러다니느라 길거리를 떠돌다가 이 무지막지한 도련님에게 들켜서 끌려 들어왔다.
집으로 강제로 들여보내지는 순간까지 욕을 강력하게 날려주시는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다.

불과 몇십 분의 마주함이 이들을 '걱정되는 사이'로 만들어 놓았다.
목적지에 다달은 요요는 이젠 문 꽝 닫고 가버리면 되는 승객은 이미 아니다. 주는대로 받는 헬무트에게 요금이 모자란걸 확인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다른 목적지로 혼자서 가야할 헬무트를 걱정하며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다.
요요를 연기한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라는 이름 복잡한 배우가 특히 좋았던, 재미와 감동이 절묘히 배합된 이 에피소드를 다섯개 중에서 제일로 꼽는다.

3rd episode

코트디부아르 출신이라는 기사양반을 계속 빈정대며 모욕하는 승객들이 있다.

까불어 대다가 강제 하차 된다.
그리고 진짜 주인공인 승객이 탄다. 맹인인 이 여자, 목적지까지의 길도 꿰고 있고, 그 어렵다는 '흔들리는 대중교통 속 화장'도 능숙히 하며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대사 한줄에서도 당당함이 묻어난다.ㅎㅎ
목적지에 여자를 내려준 기사 아저씨는 맹인인 그녀를 걱정하는 소리를 해대지만 여자의 당당함에 관객들조차 덤덤하고...

그리고 이 웃음은...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택시를 어딘가에 갖다 박는 굉음에 대한, 오지랖 넓은 걱정에 대한, 의미심장한 리액션ㅎㅎ 

4th episode

말많은 베니니는 역시 말이 많다.
심지어 승객을 태우러 혼자 가면서도 쉴새없이 지껄이고 노래하고 박자를 맞춘다.

무뚝뚝한 신부를 태우곤 또 계속 말을 콸콸 쏟아낸다.
그리고,
심장에 문제가 있는 이 신부는 죽어버린다.

공원에 저렇게 앉혀놓고 냅다 도망친다.

5th episode

꼭 이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파리, 로마, 헬싱키에 가봤던 생각이 번뜩 났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난 건 이 헬싱키 에피소드에서였다.
파리, 로마는 익숙한 영화배경이라 먼 대륙의 유명한 도시로만 느껴지지만, 단 하루 헬싱키를 밟았던 경험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이 마지막 에피소드에선 해 뜰 무렵의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져서 감탄했다.
정말 내가 이 도시에 갔던걸까?^^

저렇게.. 애매하지만 절묘하게 무게중심을 만들어 서 있는 세명의 취객을 택시가 태운다.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게 쓰러져 있는 저 사람의 암울한 상황이 평범한 택시를 교감의 공간으로 만든다.
여러가지 참담한 상황에다 오늘은 해고까지 당한 저 사람.

너무 아름다워 그냥 찍어버린 스샷이다.
저런 황량하면서도 부드러운 풍경.. 눈은 언제나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아름다운 법이지..
신세한탄을 하는 승객들에게 기사 아저씨는 세상에는 더한 고통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으로 위로하려고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꺼낸다. 숙연해져서 담배를 나누게 되는 승객들은 이렇게 남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그 와중에 술에서 약간 깬 해고자가 프레임 안으로 등장~
이웃의 굿모닝 인사로 점점 술에서 깨어나고 있는 저 사람은, 모두가 겪고 있는 치열한 고통의 삶에서 희망을 얻었을까?
푸른 새벽의 여백 만큼이나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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