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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가슴을 후벼파는 심리 묘사물과 '닉 혼비'의 연애소설을 비교하자면, 소재, 상세한 묘사, 연애에 이론으론 통달한 듯한 화자가 지휘해 나간다는 것이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반응이 다르다.

연애 사이클에서 일어나는 (본인들은 특별하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흔한 감정들과 그로 인한 온갖 부끄러운 행동들을 활자화 해서 눈 앞에 들이 밀면서, "네 꼴을 봐!"하는 기분을 주는데, 알랭 드 보통의 연애심리를 다룬 소설들은 표현이 고상해서인지 주인공에 동화되기 보다는 늘 '알랭 드 보통'이 참 무서운 사람이라는 느낌이 컸다. 

그에 비하면, '닉 혼비'는 확실히 좀 더 '갑남을녀' 친화적이어서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키득대는 그 맛을 노골적으로 즐길 수 있다. 특히 <하이 피델리티>는 화자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 누구든 자신이 바로 겹쳐 보여서 "아.. 내가 다 부끄럽네"를 외치며 자신의 연애사를 돌아보게 할 것이다.

나는 <하이 피델리티>를 영화로 먼저 봐버리는 불운을 겪어서, 원작 소설을 펼쳐들 때 특별한 마음가짐을 위한 발동을 좀 걸어 줘야만 했다. (실패했지만.) 
"가난하고 실연한 남자가 아무리 찌질한들.. 외모가 '존 큐잭'인데 용서 안 될 이유가 뭐냐!"라는 교리와도 같은 대명제에 딱 갇혀버려서 원작가가 설정해 준 찌질이 '롭'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궁시렁1) 
영화의 국내용 제목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따위인 것에 대한 울분은 예전에 많이 토로 했으므로 생략하겠다.

궁시렁2) 
John Cusack이라는 이름을 '쿠삭'이라고 발음하는 것도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큐잭'이라고 하고, 난 그걸 많이 들어와서 '쿠삭'은 너무 웃겨 입에 못 담겠다.


원작 소설을 본 것은 영화 개봉 후 거의 5년이나 지나서였음에도, 존 큐잭과 팀 로빈스의 충격적인 비주얼이 잊히질 않아서 원작에 비해 영화가 어느 수준인지 전혀 평가할 수가 없음이 안타깝다. 원작을 읽고나서 영화화 된 영상을 보기 시작할 때의 설렘을 놓친 것도 아깝다. 
사실 이 영화는 전체적인 내러티브 보다도 극중 인물 대여섯 명을 제대로 설명하기만 해도 성공일 수 있는 작품이다.그리고 그 것도 성공적이다.
 

두 시간을 꽤 잘 쪼개어 쓰면서 말 많은 '롭'의 수천마디 대사를 앞뒤로 재배치하거나 에피소드를 적당히 생략하여, 이 만하면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주변 인물들 중에서 사실 가장 개성 강하고 매력적이기도 한 친구인 '배리'를 연기하는 '잭 블랙'이 좀 과할때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너무 뒤죽박죽 정신없이 산만하다'는 느낌도 있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이렇다. '챔피언십 비닐'이라는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여러모로 평범하지만 딱히 빠지는 것도 없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롭 고든'이 동거녀 '로라'로부터 차인다. 그리고 "내 지난 여자들 중에서 로라 넌 가장 상처를 준 여자들 TOP5에 끼지도 못해!!!"라고 소리치며 그 지난 여자들을 차례로 찾아간다. 그리고는 과거에 자기가 왜 차였는지를 물어보기까지 하는 놀라운 얘기다. 그리고, 옛 여자들을 찾아갔던 그 모든 과정이 '로라'에게 미련두는 과정이었고 결국 '로라'가 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이야기의 큰 줄기이다. 

그 와중에도 꽤 유명한 여가수에게 반하고 같이 자는 얘기, 로라 역시 롭과 같이 살던 때 윗집에 살던 남자(충격적인 외모의 '팀 로빈스')와 바람나고 자는 얘기, 오로지 로라가 이안(팀 로빈스)과 잤는지 안 잤는지가 관심이고, 로라의 대답 "아직 안잤다"에서 '아직'에 온갖 희망을 걸고는 그 희망을 붙잡으려 별 짓을 다 하는 롭의 얘기이다. 
레코드 가게의 점원인 캐릭터 강한 친구 두명의 얘기도 곁들여진다. 
그리고 이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각종 음악 TOP5 시리즈가 불쑥불쑥 등장한다.

<하이 피델리티>는, 제대로 즐기기 위한 몇가지 조건을 요구하는 불편을 준다. 그래서 취향을 타는 영화지만, 어쩌면 그 여러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에만 촛점이 맞아도 되는 오히려 친절한 작품이기도 하다. 
연애에 관심 많고 연애에 대한 이런 저런 경험을 기본 요건으로 하고, 중얼 중얼 떠들어대며 가끔은 카메라를 쳐다보기까지 하는 편집증적인 찌질이를 사랑스러워 하면서, 팝음악에 매니악한 취향이 있는 30대라면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겠다. (까다롭기도 하네.) 


롭, 친구 딕과 배리, 그리고 중간중간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이 수시로 만들어 내는 각종 음악 리스트에 촛점을 두고 보는 것이 가장 재밌있을 것이다. 6~80년대의 팝과 뮤지션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리스트에 동조하거나 그들의 취향에 참견해보는 맛도 있을 것이다. 
닉 혼비의 방대한 음악 세례에 참여할 수 있을 만한 음악적 지식이나 재능이 없다면, 롭과 로라를 축으로 한 연애이야기에만 몰입해도 된다. 
연애를 함에 있어 자신이 쿨한지 찌질한지, 찌질함이 어느 정도인지 등을 가늠하는 체크 리스트로 사용하면 되고, 롭이 지난 여자들을 만나러 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과거 연인들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찌질함'에 대한 기준을 세우거나 반성할 것이라도 있는지 돌아보면 된다.


원작 소설의 마지막에 '롭'은 기자로부터 평생 기다려온 질문을 받는다.
"What are your all time top 5 favorite records?"

이 위대한 질문을 꿈꾸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롭은 사실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아무 조건을 달지 않은 "가장 좋아하는 다섯 개!"를 꼽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거니까. 그래서 롭은 횡설수설 하면서 거의 공황상태가 된다. 

기자는 '플라잉 부리토 브라더스의 Sin City'가 첫 번째이건 세 번째이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데도, 롭은 그걸 맨처음 말했다고 해서 꼭 그게 '가장 좋아하는'은 아니란 것을 부연설명하며 흥분한다. 
정신없이 대답하고 집에 갔더니 다른 음반들이 막 떠오르고, 로라는 어떻게 '마빈 게이'의 Let's get it on을 뺄 수 있냐며 쏘아댄다. 게다가 인쇄가 되어 나온 기사에는 '롭'이 말한 '도니 헤서웨이'의 'The ghetto' 대신 엘비스의 'In the ghetto'로 잘못 되어 있기까지 한다. 
이 에피소드가 가장 좋았다. 

정말이지... 롭의 상태에 완전히 몰입해서 얼마나 키득댔는지 모른다. 나도 언젠가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 다섯개를 들면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을 상상해 왔기 때문이다. 그건, 즉석에서 해서는 안 될 질문이며, 생각나는 대로 하나씩 말해버리는 것도 불경스러운 그야말로 중차대한 문제란 말이다.
그런데, 원작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는 이 시퀀스가 없다. 그냥 아주 간단하게 처리된다. 전화로 질문을 받은 롭은 당황하지 않은 채 "녹음해서 드리죠"하고 만다.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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