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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전설

흔히 인간은 사고와 기억의 편의를 위해 갖가지 기준에 따라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한다.
그 자체로는 물론 유용하겠지만, 분류의 기준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편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바보가 되겠다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겠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그런식으로 바보가 되어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들의 말로는, 더없이 복잡 미묘한데다가 기준 자체가 애매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성격이란 것을 혈액형에 따라 간단하게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구별 방법에 의하면 인간의 혈액형은 600여 가지로 나눌수 있지만
이들은 유독 ABO식에만 집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말도 안되는 주장의 기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1927년 일본의 심리학자 다케치 후루카와가 일본 응용심리 학회지에 발표한 ‘혈액형에 의한 기질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인데, 문제는 이 당시까지는 밝혀진 혈액형이 ABO식 뿐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거밖에는 쓸게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논문은 학계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고 사장되었지만, 1970년대에 생물학이나 심리학과는 전혀 관계도 없는 기자 출신의 노미 마사히코라는 자가 이를 근거로 혈액형과 성격에 관한 책을 출간했고, 당시 일본에 바보들이 많았던지 이 책은 수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그리하여 섬나라에서 유명해진 책에서 파생된 내용들은 역시 만만찮은 바보들을 보유한 이웃나라 한국으로 전해졌으며 지금까지도 바보에서 바보로 ABO의 전설은 찬란하게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전설의 계승자들에게서 전설을 빼앗는다는 것은 가혹하기도 하겠거니와 나로서는 그럴 생각도 별로 없다.
어차피 그들은 혈액형 전설을 잃더라도 또 다른, 어쩌면 더욱 기이한 전설을 찾아내어 거기에 매달릴 것이므로 차라리 이대로 혈액형만을 신봉하면서 일관성이라도 유지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믿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자면
혈액형이 성격과 관계있다고 볼만한 과학적 증거는 전혀 없음에도 왜 그것이 맞는 것처럼 느껴질까?
'당신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 하며 당신의 희망중에는 비현실적인 것도 있습니다.'
위의 표현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누가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혈액형 란에서 저런 내용을 보게 되면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즉, 누구에게나 맞는 일반적인 성격 묘사를 자신만의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심리학 용어인 '포러 효과'는 인간의 그런 심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실연당한 사람에겐 모든 이별 노래의 가사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것만 같아서 더 슬프게 들리는 그런 심리 말이다.


끝으로, Rh+형이자 다양한 사람들을 폭넓게 배려하는 친절한 성격의 필자로서는
이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성격과 혈액형의 관계에 아직도 미련이 남은 사람들이 있다면
인간의 성격을 혈액형 성격 구별 미신을 믿는 바보같은 성격과 그렇지 않은 정상적인 성격으로 나누는,
보다 타당한 기준을 강력하게 제안하는 바이다.

덧붙임


많은 사람들이 혈액형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특징을 가진다는 얘기를 신나게 하다가도  어느 누군가 과학적인 접근으로 반박을 하면 꼬리를 내리고는 이렇게 넘어가려 한다. 

"그냥 재미로 하는 얘긴데 뭘~"

마음 속으로는 혈액형으로 성격을 따지는 것이 너무나 헛소리라는 것을 1%라도 인정해서 살짝 부끄러워 한다는 증거다그만하면 스켑틱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O은 아닌 것이니 괜찮다.

그런데 의외로, 이 혈액형별 성격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것이 사실로 느껴지면 너무나 황당해 진다. 그런 성향을 가진 지인과의 실제 대화.

"B형 남자한테 질려본 적 있어? 없으면 말을 말아!"

"너를 질리게 한 그 남자가 우연히 B형이었겠지."

"아니야. 나도 다른 건 안 믿는데 이건 정말 맞는것 같아.

"(아마 다른 것도 믿을 것 같은데?)"

게다가, 소개팅이나 선을 볼 상대에 대해 사전 파악을 할 때에도 혈액형을 먼저 묻고는 그에 따른 선입견을 가져버리거나 심지어 특정 혈액형을 가진 상대는 아예 만남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보면 그저 허탈하고 한심할 뿐이다.

이 정도가 되면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건데 억울하고 안타깝지 않을까?

서점에 가보면 혈액형 트렌드를 캐치해서 헛소리를 하는 치크북들이 넘쳐난다.
우리나라.. 아니 당장 내 주위의 분위기만 보아도 이건 짧은 트렌드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 그런 책도 당분간은 장사가 좀 될 것이다.
저자 자신이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있건 아니건 그렇게 시장에 민감하게 반응한 기획력과 부지런함은 칭찬한다.
나는 그런 책을 보면, 혹시 저자 자신은 스켑틱인데 혈액형별 성격을 맹신하는 철부지들을 타겟으로 책을 쓰고는,  완벽히 조종당하는 그들을 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재밌고 통쾌할것 같다.

나는 최근에 혈액형이 바뀌었다.
30여년간 O형인 줄 알고 살았는데 제대로 검사해보니 AB형이었던 것이다.
이 두 혈액형이 검사할 때 종종 헷갈리곤 한다고 한다. 물론 ABO식 혈액형 검사일 때 그렇단 얘기다.

그렇다면 나는 성격이 바뀐 걸까? 그저 실소만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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