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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하는 영화들만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영화 흐름의 전부이며 현대 영화사를 온전히 누리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영화들을 있게 한 옛날 영화들을 보다 보면, 지금은 거대자본과 테크놀로지가 만든 주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그 깊은 아래를 끊이지 않고 함께 흘러가고 있는 숨은 영화들이 몇십년, 몇백년 후엔 오히려 영화 역사의 지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컬트'로 일컬어지는 영화들이 태생부터 컬트였던 것은 아니듯이, 지금은 어둠속에 있는 영화들이 많은 영화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을 통해 재생산되면서 후대엔 어떤 거대한 존재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 가끔, 지면이 주어질 때마다 오늘날의 영화를 만든 옛 영화나 가까운 시기의 숨은 걸작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숨어있다는 것은 개봉관 수(또는 개봉 여부-_-), 흥행의 정도, 작품의 오래됨을 척도로 할 수밖에 없고, 걸작의 기준은 순전히 내 취향에 따를 수 밖에 없음을 말해둔다. 
(소개할 두 영화를 "숨은" 걸작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프랑스가 들고 일어날 일이겠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함께 자라온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에겐 그럴 수 있다.)

나는 '아트 영화'를 좋아한다. 아트영화.. 후후.. "또 아트영화 보냐"라는 약간 꼬인 물음에 "아트는 무슨 아트."라고 눈을 내리깔곤 하지만,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무언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라 한다면, 그 어렵고 고통스런 영화들이 확실히 아티스틱하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옛날 영화들은 예술스럽고 지루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떨쳐내주고 싶고 그 영화들이 오늘날의 영화를 만든 것임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어려운 감독의 전혀 어렵지 않은 두 작품을 골랐다.

소개할 영화는 프랑스 영화사의 이단이면서 스타일에 있어서 후대에 큰 영향을 남긴 로베르 브레송(1901~1999)의 작품 중에 가장 재밌는 두편 <소매치기(pickpocket,1959)>,<사형수 탈출하다(a man escaped,1956> 이다. 

이 두 영화를 단순히 재미있어서 좋아한다고 하면, 어려운 영화를 더 어렵게 보는 많은 수준 높은(?) 영화인들은 나를 내려다 보겠지만, 나는 어려운 영화의 그 참을 수 없는 난해함 속에서 이해나 해석보다는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속에 담긴 구원과 라스콜리니코프적인 양심과 속죄의 문제는 차치하고, 요즘의 어떤 영화에도 뒤지지 않는 극적 긴장감과 건조한 브레송 스타일을 우선 즐길 뿐이다.
물론, 처음 그냥 보았을 때와 작법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를 접하고 브레송의 다른 작품들과 아울러 보았을때 참 달라 보이던 묘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까르르 웃었던 장면이 심오하게 다가오는-_-;;;)

두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참 어색하다. (브레송은 '배우'라는 표현 대신 '모델'이라고 했다.)
마임같이 표현되는 감정 없는 연기가 참 우스꽝스럽긴 한데, 어디서 저렇게 연기력 부족한 좀비같은 배우들을 가져다 썼는지, 저런 '자연스럽지 못한' 연기에 감독은 과연 만족한 건지, 5~60년대 영화가 다 저런 것이 아닌데 저게 브레송 스타일인건지... 이런 것이 첫느낌이었다.

그런데 인물들의 행동의 배경으로 작용하는 내면 감정, 심리, 동기 등을 부정하고, 많이 표현하기보다는 제거해감으로써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려는 금욕적 특성을 추구한 것이 브레송 스타일이고, 그것을 위해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음을 알고나면, 영화의 내용보다 그 스타일에 몰입하게 되어 우습던 장면들이 우습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개런티가 싸거나 연기가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비전문 배우를 쓴 것이 아니라 연기에 코드화된 면이 적으니 제거해나가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보면 브레송의 요구는 배우들에게 가혹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너의 그 행동이 어떤 감정에 의해 나오는거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했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액션영화"의 시초라고나 할까. 감정은 사라지고 액션만 남은 영화 말이다.ㅋㅋ

이런 것에 관해 '히치콕'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오명>에서 여주인공(잉그리드 버그만)이 캐릭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그 동기가 이해 안 된다고 하니 히치콕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돈을 받고 연기를 하는 거니까 돈을 동기로 생각하고 해라. 나는 디즈니가 부럽다. 캐릭터를 맘대로 만들어 내니까." 하하, 이런 배경들을 알고보면 그냥 재미로 봐도 되는 <오명>에서 감독의 영화적 스타일을 덤으로 더 볼 수 있게 된다.
감독의 스타일과 작법이 어떻든 간에, 알고 보건 모르고 보건, 하여간 이 영화들은 재밌다. (어렵게 보려면 얼마든지 어렵게 볼 수도 있고..)

소매치기 방법과 탈옥 방법의 매뉴얼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다. 특히,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인 <사형수 탈출하다>는 나치에 의해 수감된 레지스탕스가 무사히 탈출하기까지 감정이 몽땅 배제된 행동을 보여주는게 전부인 영화인데 그 서스펜스와 긴장감, 간간이 섞인 유머코드까지 정말 최고다.

브레송과 그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작가로서의 개인적 스타일을 넘어서 영화 고유의 스타일을 이루었다는데에 있다.
영화의 초창기에 사람들은 나뭇잎이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의 방향에 기겁해 도망갔으며, 프레임에 의해 잘려 나오는 팔다리에도 어떻게 사람 팔을 자를 수 있냐고 했다.
지금 우리의 눈엔 따분하기만 한 기법이라 할지라도 그런 스타일의 탄생이 당시엔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을지 생각하며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영화를 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두 영화는 어렵지 않지만, 프랑스 누벨바그 전후의 영화들에는 참 어려운 것들도 많다.
어려운 영화와 함께 한바탕 졸고난 후, 이해되지 않는 머리로 내가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 떠올리곤 하는 명언이 있다.
'프랑소와 트뤼포'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가 아름다우면 됐지 꼭 이해가 돼야하나".
하하, 물론 이렇게 무식한 표현이 아니라 뭔가 있어보이는 문장이었지만 하여간 난 정말 동의한다.

타르코프스키, 키에슬롭스키, 키아로스타미...이런 이름 어려운 감독들이 어려운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수많은 질문들을 던져줄 때, 해답을 찾으려하지 말고 그냥 즐기거나 내 방식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질문을 되돌려주면 된다. 어차피 그들은 연출가를 넘어선 "예술가"니까. 질문만 줄창 해대는 족속들이니까.

덧붙임.
국내에 DVD로 출시돼 있는 작품이.. <사형수 탈출하다>, <호수의 란슬롯>, <아마도 악마가> 3개의 영화를 묶어서 박스셋으로 나온 것도 있고... 몇개 되긴 한다.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저항(=사형수 탈출하다)> 디지팩이 있는데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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