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전 정보도 얻지 않으려고 매우 애를 썼다. <참을수없는 사랑>, <레이디킬러>를 겪으면서 이제 코엔 형제도 감각이 떨어지는 건가 하며 실망했던 그 몇년을 지나, 드디어 예전의 그 유려한 느와르로 돌아가는 새 작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
새 작품이 대략 이러하다는 사실 이외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알게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검색도, 잡지도, 영화소개 TV프로그램들은 물론이고 다 피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범인이다! 또는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 같은 식의 명확한 반전 때문이 아니더라도, 영화의 그 모든 것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쓰기가 조심스럽다. 영화를 보실 분은 여기서 읽기를 그만두시기를.
사전 노력 덕분에 등장 배우조차 몰랐다.
'토미 리 존스'의 등장에 앞에 나온 저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건가? 싶었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계를 한참 지나서야 나오는 '우디 헤럴슨'을 반가워 하면서도, 주요 조연이 또 나오나? 하는 상투적인 생각을 한건 뻔하디 뻔한 영화들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코엔형제의 영화임을 상기하니 유명배우가 주연이고 주연배우가 범인을 잡을거라는.. 아니, 주조연이 따로 있을 거라는 따위의 감상은 금세 떨쳐졌다.
텍사스의 사막에서 사냥을 하다가 우연히 거금의 마약 밀매 대금을 손에 넣게 되는 '모스'는 양적으로 비중있는 출연을 하고 있지만 왠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다. 그에 비해,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발머리가 더욱 섬뜩해 보이는 '안톤'이 확실히 달리 보이는 것은 전적으로 '하비에르 바르뎀'이라는 배우의 공이다. (이 사람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싶었는데 서너번 본 <콜래트럴>에 잠깐 나온 그 분이시네. 헤어스타일에 따라 이렇게 달라보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안톤 쉬거'는 동전을 던진다. 단연 가장 강렬한 배역(그래서 이번 아카데미 조연상에 노미네이트)인 그는 영화 역사상 몇 안되는 무지막지한 살인마이지만, 그 무차별 총질에는 뭔가 원칙이 느껴진다는 것이 특이하다. 동전던지기로 결정되는 살인은 우연 같지만 그게 그의 원칙이고 룰인 것이다. 정말로 매력적인 영화 속 인물이다. (문고리를 쏙 날려버리는 산소통 달린 직접 개조한 총은 보기만 해도 어찌나 무섭던지.) 그리고 토미 리 존스. 오프닝의 나레이션과 엔딩의 꿈 이야기로 스토리 라인을 정리하고 영화에 철학적인 깊이를 더해주는 보안관 '벨'역의 토미 리 존스는 "유명배우가 고작 조연을 맡았다"고 폄하할 수 없게 한다.
참 묘한 전개인 것이.. 끈질기게 잘도 헤쳐나가던 모스의 허무한 죽음과, 100분이 넘도록 그렇게 긴장하게 했던 그 치밀한 쫓고 쫓김의 끝이 될(거라 생각했던) 한바탕 총격전의 순간은 보여지지조차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진부함을 깨주는 코엔형제 스타일의 절정이다. <블러드심플>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하는 빛의 사용, <바톤핑크>(코엔 작품중 제일 좋아하는)의 음침함이 느껴지는 피의 끈적임, 한 번 나오고 마는 인물들이 내뱉는 한마디 대사조차 허투루 씌어지지 않은 듯한 의미심장함. 같은 돈, 같은 시간, 같은 기술로 왜 우리나라 영화는 이런 세련된 긴장감과 매력적인 악역과 깊은 사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지, 그게 한계라는 생각이 들 만큼 정말 관객의 심장을 쥐었다 놨다 하는 영화다.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는,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누구나 한번 무슨 뜻일까 하고 되짚어 볼 제목인데.. 감독은 원작소설이 있으니 원작자에게 물어보라는 대답으로만 일갈했다고 한다.
뭐라고 명료하게 설명하긴 힘들지만(그럴 필요도 없고.)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그 허무주의적 느낌만으로도 제목이 주는 암울한 미래상과 자연스런 연관이 지어지니 이 정도로만 생각해도 될것 같다. 굳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안톤을 응징하지 못한 노인 벨 보안관의 무기력함이라고 해볼까? 글쎄 뭐 그렇게까지 구체화할 필요가 있을까?
자, 세련된 두근거림을 만드는 서스펜스 느와르, 특유의 배꼽빠지는 코미디, 이 둘 모두에 천재적인데다..그 웃음과 긴장감 속에 깊은 메세지까지 끝내주게 버무려놓는 코엔형제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딱 <블러드심플> 만큼의 수작이라고 한다면 충분한 칭찬이겠지.
+ 이 영화가 정말 마음에 들지만, 미국의 많은 평론가들이 극찬하는 대사들은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라 좀 낯간지럽다.
히치콕도 결코 만들지 못한 최고의 서스펜스(데이빗 스트래톤) : 히치콕이면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두말할 필요 없는 올해 최고의 걸작(롤링스톤지) : 2007년 초중반 잘 찾아보면 이렇게 평가했던 영화 또 있었을 걸?
파고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기적, 여기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로저 애버트) : 뭐 기적까지야. 그렇다면 내겐 바톤핑크가 더 기적이다.
+ 안톤 쉬거가 당하는 (동전 던지기 같이)우연한 그 자동차 사고는.. <어댑테이션>의 그 충격적이었던 실감나는 사고 장면을 확 떠오르게 했다.
+ 일요일 점심무렵의 용산 CGV 8관엔 적당히 많은 관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영화를 망치고 싶지 않아 시사회에도 가지 않았던 나이건만, 참으로 갖가지 뻘짓은 다 하는 두 아줌마가 내 옆에 앉고야 말았다.
그 두분은 영화 내내 번갈아가며 전화를 두번 받고 화장실엘 갔다오고 문자질을 하고 전혀 웃기지 않는 부분에서 깔깔대고 (대체 이 영화에서 그렇게 깔깔댈 부분이 어디란 말인가!) 딴짓하느라 놓친 장면들을 서로 설명해주는건지 속닥속닥 대화하고.. 하여간 극장의 만행으로 일컬어지는 행동은 죄다 하시었다.
난 영화 시작 후 1분 이내에 이미 그 만행의 희생양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최대한 구석 자리로 옮겨 갔지만 꽤 떨어진 그 자리에서조차 그들의 만행이 느껴지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것은 글쎄 이 두분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셨다는 사실이다. 영화나 제대로 볼 것이지 엔딩 끝까지 다 보는게 세련돼 보인다는 것은 어디서 줏어듣고 왔나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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