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이유로 근 2년을 개봉작을 거의 안 보며 살고 있다. 개봉작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를 끊었다. 친구를 만나서 시간을 때울 때와 정말 영화가 보고싶어서 미칠 지경일 때에는 굴복하지만, 그래도 2년여간 영화에 대한 정보를 거의 차단하고 살았다.
작년에 '영화전문사 자격증'을 딸 때 며칠 빠짝 시험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시험 공부였다.
<휴고>에 대해 오랜만에 쓴다.
이 영화를 보지 않고 넘어가면 말이 안되는 거였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봐 버렸던 것이 이유이긴 했지만, 많은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트레일러에 등장하는 많지 않은 2D컷들에 온 마음을 뺐겼기 때문이었다.
개봉하는 극장이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도 회사에서 멀지 않은 독산동 프리머스가 있었다. 평일 밤이라 관객은 모두 다섯 명이었기에, 몰입을 도와주었다.
안경을 쓰고 보는 3D영화가 처음이었다. 흥행몰이를 했던 <아바타>도 보지 않았으니까.
3D는 정말 신기했다.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지를 못하니 <휴고>의 3D 기술이 얼마나 훌륭하게 적용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고, 또 나는 영화의 기술력에는 많이 감동하지 않는 편이라서 "우와~신기하다" 정도의 반응이면 상당한 것이었다.
주요 배경이 되는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 역'의 역동적인 모습들이 3D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 적합하고, 역무원과 감시견의 클로즈업 샷 몇개도 멋진 3D영화를 보고 있음을 강하게 일깨운다. 시계탑 속의 중첩된 태엽의 원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놀라운 3D는, 낡은 흑백 2D로 잠시 잠시 삽입된 <safety last, 1923>와 <제너럴, 1926>,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1920>, <키드, 1921>, <기차의 도착, 1895>등을 오히려 더욱 돋보이게 하는 큰 역할을 한다.
<휴고>.
나는 스스로를 '영화매니아'라고 칭하는 사람들에게 알러지 반응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그 '자칭'을 택한 것이겠지만, 그런 호칭은 남이 해주어야 진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휴고>는 이 역할까지 톡톡히 해 준다.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쏟을 수 있다는 건, 영화의 스토리나 기술의 문제를 넘어 존재 자체에, 많은 부침속에서도 발전(?)해와 준 생명력에, 또는 보랏빛으로 바랜채 비가 죽죽 내리는 낡은 필름에 대한 물리적 애정마저 가졌다는것을 뜻한다.
한 마디로 전통적인 관점의 시네필의 요건을 꽤 갖추었음을 상당히 인정받는 기분을 안겨주는 것이다.
<휴고>는 '마틴 스콜세지' 개인의 영화광으로서의 고백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조르주 멜리어스'에게 바치는 헌사인 것만도 아니다. 이 영화는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영화 애호가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다.
특정 작가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그런 선지자들에게 태곳적 연민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 시네필들 전부를 위로하는 영화다. 조금더 좁히자면, 수많은 블록버스터와 멀티플렉스, 무결한 디지털의 침공 속에서도 꿋꿋이 낡은 스크린과 필름의 맛을 그리워하는 구닥다리 시네필들을 응원하는 영화다.
눈부신 3D속에 평면으로 삽입된 '버스터 키튼'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영화 중후반, 주인공이 휴고에서 조르주 할아버지로 변하면서부터 그려지는 멜리어스의 노년은 버스터 키튼의 그것과도 비슷한 느낌인데, 키튼 역시 당시엔 평가받지 못한 채 네가 프린트들을 창고에 쌓아만 두었었고, '레이먼드 로하우어'가 이를 발굴하기까지 잊힌채 힘든 노년을 보냈다.
<휴고>속의 잡지 발행인처럼 레이먼드 로하우어의 노력이 있었기에, 60년대에 이르러서야 버스터 키튼은 늙은 몸으로나마 오스카 평생공로상의 무대에서 후배 영화인들의 기립박수 속에 인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그마치 100년 후인 지금의 내가, 무표정한 채 최선을 다하는 날쌘 그를 보며 폭소와 함께 눈물지을 수 있다.
조르주 멜리어스가 창시했다고도 할 수 있을 놀라운 특수효과들도 키튼과 겹친다. 멜리어스처럼 키튼 역시, 소리도 넣을 수 없었던 지난세기 초, 당시엔 상상조차 어려웠던 특수효과를 여러 작품에서 선보였다.
키튼의 단편들 중에는 육성 감탄이 절로 나오는 놀라운 장면들이 많다. (마술로 시작, 서커스로 시작인 점도 둘의 비슷한 점이다)
'예술영화'라는 칭송 속에서도 흥행영화는 모조리 미국에 그 자리를 내 주어버린 지금, 프랑스 국민은 누구나 이 영화에 눈물 흘릴 것이다. 우리가 시초이며 기술적 혁명도 우리로부터였다는 자부심이 새삼스레 다가올 것이다.
조르주 멜리어스의 실제 노년을 그리는 대목에선 쏟아지는 안타까움과 연민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필름이 녹아 구두 굽이 되는 상황, <달세계 여행, 1902>에 쓰였던 달을 불태우는 광경, 그리고 노인이 된 멜리어스의 얼굴이 영화속 젊은 멜리어스로 대체되는 그 순간 말이다.
우리나라 초기 영화사에도 힘든 상황속에 영화를 만들어 일제강점 동안이나 전후의 힘겨운 국민들에게 새로운 눈과 새로운 행복을 부여한 작가들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이런 영화로 만들어진들 우리들이 그걸 보며 눈시울 붉힐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이 슬플 뿐이다. 초기 프랑스 영화가 두차례 세계대전이라는 시련과 무관심속에 급격히 쇠락했건 어쨌건, 지금, 국민이면 누구나 저 달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자랑스러워하며 <휴고>와 같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운 노릇인 것이다.
이 영화, 우리나라에선 절대 흥행할 수 없다. 흥행은 커녕 수많은 멀티플렉스 속에서 개봉관 몇 개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김없이 "아카데미 여러부문 노미네이트"라는 문구를 포스터 가득 찍거나, 최근 몇 년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국내에서 인기가 올랐던 '주드 로'를 내세우는 홍보방법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
영화의 홍보 카피는 이렇겠지.
"아빠의 로보트가 품은 비밀을 찾아 나서는 소년의 모험담!"
"가족의 사랑을 그린, 아바타를 능가할 3D 어드벤처!"
이럴 공산이 크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것이 현실이다. 이 문구에 따라 극장을 찾은 가족단위 관객은 필패한다.
영화계 종사자나 프랑스 국민을 넘어, 전 지구적 시네필들에게 동지적 흥분을 준 <휴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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