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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동안 평점을 만점 주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
감독으로서의 '조지 클루니'를 무슨 말로라도 칭찬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고 널리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이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대한 한 가지 이슈와 몇 사람에게만 제대로 집중하고 있다.
그 건조함을 유화시키는 도구로, 매우 지적인 유머와 의미심장한 가사의 재즈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주제가 선명한 영화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감초 같은 역할'이라며 끼워 넣곤 하는 바보같은 캐릭터나 뜬금없는 러브 스토리로가 아니라 말이다. 이런 점이 바로, 우리나라 영화를 비롯한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영화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수준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메카시즘 광풍, 마녀사냥, 연좌제, 언론의 용기 등을 다루는 이 이야기는 당최 50년 전의 남의 나라 사연으로만 보아넘길 수는 없는 것이었다.
러닝 타임 100분 동안은 머리속에서 미국이란 특정한 나라는 자연스레 잊혀지고, 진실 그 자체를 추구하는 올곧은 언론인들의 투구에 존경심만을 가득 갖게 된다.

낡은 필름의 느낌이 나는 모노톤의 화면 속... 그 용기넘치는 중년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깊게 패인 주름조차 너무나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잘생긴 배우의 대명사가 되어 왔던 '조지 클루니'는 연출가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하고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배우로도 출연하는 조지 클루니는 역할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체중도 굉장히 불렸다. 연출가로서의 그는, 미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로버트 레드포드 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극찬을 하고 싶다.
다른 배우들의 훌륭함은 어떤 말로 추켜세워야 하는지 어휘력의 부족이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점. 꼭 필요한 곳에 쏙쏙 끼워넣은 멋스러운 유머감각이 정말 빛이 났는데, 혹시 언어나 지식의 문제로 알아 듣지 못하고 흘려 보내버린 대사는 없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거의 한 장면도 빠지지 않고 큰 존재감을 보여주는 요소로 '담배'가 나온다. 이 또한 마초들의 겉멋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용감한 언론인들의 고뇌와 긴장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용도로 제 역할을 다했다.

1999년 제 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있었던 꽤 충격적이었던 '엘리아 카잔' 감독의 평생공로상 수상 장면이 생각난다.
엘리아 카잔은 영화 감독으로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에덴의 동쪽>, <세일즈맨의 죽음>, <워터프론트> 등, 걸작으로 인정 받는 많은 작품을 창작한 거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평생공로상의 주인공으로 그 노감독의 이름이 불리우고 그의 영화 인생을 쭉 훑어주는 감동적인 영상과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 객석의 반응이라는 것은, 당시의 어린 나에게 정말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객석의 수많은 스타들이 기립하지 않고 박수도 치지 않으면서 무표정으로 이 노감독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엘리아 카잔 감독이 바로 이 메카시 광풍 당시에 동료 영화인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발했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때 맨 앞줄에 앉은 '조지 클루니'가 가장 뻣뻣한 표정으로 백발의 대 선배 감독을 경멸적인 시선으로 쏘아 보았던 것 같다.
조지 클루니는 이 때부터 멕카시즘을 다시 짚는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제 7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엘리아 카잔' 감독과 시상자였던 마틴 스콜세지.
공로상을 받는 노감독의 모습보다 객석에 앉아 있는 영화인들이 보여주는 극명한 반응이 더 주목할 만하다.
작가로서의 공로에 기립박수로 존경을 보내는 사람들이 반, 영화인의 사회적 역할과 도덕성에 의미를 둔, 가만히 앉아 무언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반이었다.

정말 멋진 영화다. 
이 감흥이 남아 있는 동안은 잠시라도 친미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지적인 남자가 타이를 느슨하게 맨 채, 흰 드레스셔츠 소매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리고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 대한 환상이 이런 장면에서 시작되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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