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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작품인 <초록 물고기>를 소개한다.
이 한국영화는 단연코 걸작의 반열에 넣어야 할 수작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 있는 이창동 감독의 감독 데뷔작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 놀라운 데뷔작 이전에 이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유능한 소설가였고 박광수 감독의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을 쓰고 조감독으로 참여한 바 있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각본을 써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능한 각본가가 영화 감독으로서의 역할에도 유능한 것은 아니다. 영화감독이라는 사람은 시나리오를 스크린 위에 시각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원본 각본이 훌륭하더라도 영화화 된 결과물은 얼마든지 망가질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창동 감독은 그야말로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로서의 실력과 그 것을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실력 모두에 있어서 정말 추앙받아 마땅한 거장 감독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울 수준의 장인이다.

이 영화 <초록 물고기>. 
이 걸작이 가진 두 가지의 대표 이미지는 이것이다.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바람에 날리는 장미빛 스카프와 주요 이야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한석규의 충격적인 얼굴 이미지.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고 꿈에 나올 듯이 뇌리에 각인 되어 버리는 이 얼굴.
이 두 장면, 즉 영화의 맨 처음과 맨 끝의 두 이미지.
이 이상한 대구에는 클로즈 업된 얼굴의 윤곽이 공통으로 사용되었는데, 유리위에 보란 듯이 일그러진 죽어가는 얼굴 못지 않게 스카프가 씌워진 채로 숨을 쉬어대는 살아있는 얼굴도 섬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첫 장면부터가 "이 영화의 스토리는 도저히 순탄할 수가 없겠군."이라는 각오를 하게 한다.
기차의 난간에 매달리는 '막동'을 봄과 동시에 비극적 결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온 몸의 말단으로 느껴버리게 되는 희한한 영화이다.
신호 위반 단속에 적발된 계란 판매 트럭이 찔러준 돈을 떼어 먹고 도망치는 경찰차를 뒤쫓아 가면서 “빽차 오른쪽으로! 빽차 오른쪽으로!”를 방송하는 발랄한 시퀀스에 폭소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깔깔대며 웃는 순간에도 전혀 희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극의 기운이 여전히 서려있다.
결국 '막동이'의 꿈은 막동이 없이 이루어졌다. 막동이 없이도 잘도 이루어졌다.
끈끈했던 가족들은 막동이가 없어도 의외로 행복하다. 정말 잔인한 세상인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실현된 꿈 속에 '태곤'이 들어와도 가족은 영향받지 않고, 토종닭을 함께 잡는 태곤은 오히려 정겹기까지 하다. 이 세기말적 아이러니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이러한 것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영화라 관객을 몹시 우울하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라는 것은 좀 꿈 같아야 좋은 것 아닌가?
아니다, 시궁창같은 현실은 그 보다 훨씬 더 척박한 꿈을 얼마든지 생산할 수 있다.
안정되게 자리 잡은 가족들, '미애' 뱃속의 아이 등을 사용해 이렇게 힘든 현실 속에도 여전히 희망은 살아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희망을 발견하고 느낀 긍정적인 사람들이 정말 부러워진다.

이 작품 속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배우는, 언젠가부터 밝고 경쾌하고 푼수같은 이미지를 가져버린 '심혜진'인데, 배우의 다양한 모습을 칭송하면서도 다시는 이런 절망적으로 아름다운 ‘미애’의 모습을 볼 수는 없을거라는 직감이 들어 슬퍼졌다.
얼핏, 순한 모범생의 얼굴을 한 배우 '한석규'는 어색할 법 하면서도 그야말로 ‘너무나 순수해서 물 불 가리지 않는 순정남'을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한 놀라운 캐스팅이 된 것이다.
배우 '문성근'의 이미지는 조직 보스로서도 묘하게 잘 어울린다. 착하게 살기에는 낭떠러지가 눈앞인 현실을 피할 도리 없이 자란 '생존형 보스'인 것이다. 수 많은 조폭 영화가 강요해 온 무식한 두목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오히려 일견 평범한 얼굴 속에 살기를 감추고 있는 모습이다.
그 외, 지금보면 초호화 캐스팅인 배우들(송강호, 정진영, 이문식)을 즐기는 재미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사랑하는 이창동 감독은 자그마치 14년 전에 이런 '저주받기 딱 좋은 걸작'을 내놓으셨으니 그 때 보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까지 하다. 이 처절한 허무를 어렸을 때는 어떻게 견뎠을까 싶으니까 말이다.
'한국의 느와르’라는 명찰을 붙이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별 생각없이 봐도 故유영길 촬영감독의 존재가 카메라 뒤에 느껴진다.
각본을 함께 쓴 '오승욱' 감독은 이 영화의 조감독을 거쳐서 <킬리만자로>로 감독 데뷔를 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먹히지 않았을지언정 멋있는 시작이 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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