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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이 할아버지의 한해 한해가 너무나 소중히 느껴지는 때가 와 버렸다.
매력 넘치는 배우, 노련한 감독, 감각적인 뮤지션의 모습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보여 온 할아버지다.
근사하게 날씬한 체격이 아직은 건강해 보이고, 변함없이 왕성하게 내놓는 작품으로 활기를 과시해 주시니 다행이지만, 걱정이 되는 마음 또한 어쩔 수 없기에 새로 나오는 작품 하나 하나가 작품성을 차치하고라도 그 자체로 고맙다.

 
 

<그랜 토리노 Gran Torino>는 설명이 필요 없는 대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우로서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배우로서의 삶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한 작품이라 안타깝고 서운하다.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라는 거대 담론 그 자체를 갖고 노는 영화다.
보는 사람의 인종이나 국적, 아니면 마음가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생길 수 있는 영화다.
무게를 잡은 채 영화 속에 은근히 백인 우월주의나 '팍스 아메리카나'를 깔아 두는 미국 영화들이 약소민족에게 짜증과 불쾌감을 일으키는 일이 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가 영화의 처음부터, 말 그대로 첫 장면부터 대놓고 "중국놈, 깜둥이, 이탈리아놈!"이라는 말을 떠들어 댈 때 저 완고한 백인 할아버지가 변해가는 내용이겠다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일견 예상대로 따라 가면서도 너무 과하게 뻔한 전개는 적절히 잘 피해준다.
흐뭇한 웃음을 주는 작은 디테일들도 참 잘 살린다.
영화에 비장함이 흐르던 초반 몇 분간은 우월감에 젖은 한 백인이 비극을 겪으면서 인종적 화해를 하게 되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할아버지 버전이겠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영화는 갈수록 아기자기해지고 할아버지는 갈수록 귀여워진다.
부인의 장례를 치른 '월트'는, 젊은 시절 한국전을 겪으며 13명을 죽인 과거에 사로잡힌 채, 이제는 하나 둘 "동양놈들"의 집거지가 된 동네에 혼자 산다.
월트는 전쟁을 겪은 노인들이 흔히 갖게 되는 애국심으로 충만해서, 그의 집엔 성조기가 내내 펄럭이고, 일본 차를 세일즈하는 큰 아들을 비난한다. 
젊은 시절에 일했던 포드 자동차에서 생산한 '그랜 토리노'를 여전히 보물처럼 여긴다.
성격은 깐깐하기 그지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손자들을 포함한 모든 것에 불만이며,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대충 이런 노인이다.
그리고 옆집의 중국인 가족과 엮이면서 결국은 그들을 아끼게 되고, 그들을 위해 순교자의 모습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기까지 하는 영화다.
이렇게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줄거리인데, 그 속의 디테일들이 아주 강하다.
백인 우월주의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보면, 재미와 감동 모두를 확실하게 챙길 수 있는 수작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떡하니 서 있는 포스터 때문에 '그랜 토리노'는 사람 이름일까 싶기도 하고 지명일 것 같기도 한데, 월트의 자동차 이름인 것을 알게 되면 그 차가 상징하는 바가 아주 크게 다가온다.
왜 하필 차고에 서 있기만 하는 그 차를 영화의 제목으로 했을까.
그랜 토리노는, 젋은날의 월트 자신이며, 타오와 마음을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나중에는 타오에게 상속까지 함으로써 화해와 우정이 진심이었음을 보여준다.
타오네 가족과 중국인 이웃들이 보여주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감사의 표현에 동양인이 너무 희화화되었다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월트와 타오가 친해져 가는 과정의 에피소드들이 주는 만족스런 즐거움과 마지막의 감동에 묻혀 결국은 좋은 점수를 주게 된다.
특히, 월트와 이탈리아 출신 동네 이발사와의 대화들, 월트가 쏟아내는 인종차별 애드립들은 아주 유머러스하다.
"내 개나 잡아먹지 마!" 이런 대사 말이다.
외국인 친구와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오히려 인종의 차이를 극복한 것이겠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근래 작품들 모두가 진중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여서 좀 가벼워지고 싶었던 건가 싶기도 하다.
늙으면 귀여워진다는데, 젊은날의 무법자 시리즈부터 거의 웃을줄 모르던 이 노 배우에게서 귀여움을 발견했다.
몇해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께 고마움을 전하면서 "어머니의 DNA에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했던 소감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당신의 DNA에도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감동'의 표를 던지는 것 같은데, 나는 '감동' 보다는 단순한 '재미'가 더 컸다.
내게 이 영화의 감동은 '월트' 할아버지가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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