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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은 주로 칭찬만 들어온 감독이었다.
하지만 그 칭찬 속에는 늘 "CF 감독 출신인데 정말 훌륭하다"라는 식의 말이 꼭 덧붙여 따라 다녔었다.
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정도면 'CF감독 출신'이라는 말 자체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거장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적어도 거장이 될 충분한 조짐을 보인다는 표현은 기꺼이 할 수 있다. '거장'의 칭호에는 어느 정도의 나이와 작품수가 기본 조건이라는 무언의 합의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하긴 그의 감각을 거친 그 CF들은 하나의 짧은 영화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으니, 관객의 감각과 감정에 소구하는 속성이라면 광고나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나 일맥상통하는 맥이 있을 것이다.

정말 보람된 하루, 의미있는 시간들로 잘 충천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거의 매주 늦잠으로 보냈던, 무의미한 시간의 대표였던 '일요일 오전'을 인생에 대한 성찰의 시간으로 바꿔 버린 이 영화의 힘에 감격했다.
진정으로 멋있는 영화다. 

한 인물의 생을 따라가며 미국 근현대사를 훑고, 삶과 죽음과 시간에 갇힌 인간을 관조한다.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 겉모습과 그 겉모습에 쉽게 갇혀버리는 내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서사시이다.
보고싶은 작품이 꽤 많았던 작년말 올해 초, 그 동안 본 영화 중 최고다.
여러가지로 <포레스트 검프>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작품인데, 나는 단연코 벤자민 버튼쪽의 손을 들어 주겠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거울만 보아도 바로 느낄 수 있는 때가 오면 누구나 한번은 "인간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와 같은 거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고, 서점의 철학 코너에 눈길이 갈 때가 있다.
철학책 속의 빽빽한 활자가 주는 선문답스러움은 가슴속에 답답함만을 더할 뿐이지만, 벤자민 버튼과 그 주위 사람들로 그려낸 이 영상은 인생과 늙어감, 태어남과 죽음을 관조하면서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해답이었다.
거꾸로 도는 시계가 단 한번 옳은 시각을 가리키듯이 데이지와 벤자민의 사랑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정상의 범위에 있었던 시기는 단 몇년 뿐이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둘은 육체를 포함한 사랑에 몰입하게 된다. 데이지는 벤자민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그의 젊어져감을 더욱 극명하게 대비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이 그렇게 다양한 생의 단계를 표현할 수 있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꽂히는 주옥같은 대사들이 계속된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딸에게 기이한 삶을 산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는 늙은 데이지(케이트 블랜쳇 분)는 죽음이 두렵냐는 물음에, 그저 "그 다음이 궁금할 뿐"이라고 답한다.
예인선의 선원으로 본의 아니게 2차대전에 참전했을 때는 적의 총탄에 죽어가는 선장이 인생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지나간 것들에 미친 개처럼 미쳐버릴수도 있어.. 운명을 탓하며 저주할 수도 있어. 하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가게 놔둬야해.."
(You can be as mad as a mad dog at the way things went, you can curse the fates, but when it comes to the end, you have to let go.)

엔딩까지도 예사롭지 않다. 
아름다운 늙음을 지닌 사람들을 하나 하나 되짚으면서 나레이션이 흐른다.
"누군가는 강가에 앉기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번개에 맞고..누군가는 음악의 조예가 깊고..누군가는 예술가이고..누군가는 수영하고..누군가는 단추를 잘 알고..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알고..누군가는 어머니다..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그렇다. 명확한 클라이막스가 없는 이 영화가 이토록 시종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서사시의 와중에도 순간 순간 감각적인 편집으로 긴장감을 최고로 올려놓는 솜씨와 세련된 유머 덕이었다.
이것이 바로 감독의 연출력이다.

벤자민 버튼은 꼭 브래드 피트가 아니었어도 된다.
그가 눈부시게 잘 생긴 배우이다 보니,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운 젊음과 쇠락한 모습의 차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장치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이다.
특히 벤자민의 거의 모든 생의 바탕에 존재했던 여인 '데이지'를 연기하면서 20대의 숙녀부터 죽음을 마주한 노인까지의 스펙트럼을 완벽히 보여주는 케이트 블란쳇과, 늙은 외모를 초월한 진실한 사랑이었던 첫키스의 상대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틸다 스윈튼의 연기가 정말 좋았다.
데이지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 발레리나의 삶을 접어야 하는 슬픔속에 병원에 누워 있을때, 더욱 젊어져서 나타난 벤자민에게 "완벽하군"이라 말 하는데, 내 생각과 똑같은 대사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 지 모르겠다.

+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아기 노인" 벤자민에도 당연히 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소스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에는 극중 인물들의 이름이 등장한 순서대로 나타나는데, 브래드 피트가 한참 후에야 나온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러시아에서 에봇 부인을 만날때에 가서야 순수한 브래드 피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참 오랜만에 보는 줄리아 오몬드도 반가웠다. 영화 <가을의 전설>에서 브래드 피트와 연인으로 출연했던 그녀가 이 영화에서는 딸로 나오는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13개 부문 후보에 올라있다.


Best Motion Picture of the Year
Best Performance by an Actor in a Leading Role - Brad Pitt
Best Performance by an Actress in a Supporting Role -Taraji P. Henson (스탭맘 퀴니 역)
Best Achievement in Directing - David Fincher
Best Writing, Screenplay Based on Material Previously Produced or Published - Eric Roth, Robin Swicord
Best Achievement in Cinematography - Claudio Miranda
Best Achievement in Editing - Angus Wall, Kirk Baxter
Best Achievement in Art Direction
Best Achievement in Costume Design
Best Achievement in Makeup
Best Achievement in Music Written for Motion Pictures, Original Score 
Best Achievement in Sound
Best Achievement in Visual Effects

데이빗 핀처 감독이 앞으로도 진정한 영화 작가의 길을 걷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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