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영화로' 즐기기 위해선 아무것도 모른채 보는게 중요하다.
서로를 모른채, 지극히 평범하게 온화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네 사람의 오후를 각각 보여주며 시작하는 동안, 몇 년전의 어떤 테러사건에 대한 뉴스가 흐르지만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상관없어보이던 그들은 한 곳에 모인다.
모인 그들이 함께 차를 타고 숲속 호숫가로 가는 동안에도 일상을 즐겁게 얘기하니 목적을 알 수 없다.
호숫가 다리에서 차례로 기도하고 묵념하는걸 보니 거기는 어떤 '현장'인것 같다. 그곳에 따로 온 한 남자를 본다. 말을 걸지만 가버린다. 그리고 나와보니 차가 없어졌다. 해 지기 전에 걸어 내려갈 수 없는 거리다. 뒤따라 다시 등장한 그 남자를 따라 숲속의 어느 집으로 들어간다.
이들 넷은, 3년 전 신흥종교단체의 동경 독극물 테러사건 가해자들의 가족. 나머지 한 남자(아사노 타다노부!)는 그 종교단체의 일원이었다가 탈출한 생존자.
그 사건은 100명 이상의 사람을 죽인 참사였고 교주는 그 일을 실행한 신도 넷을 불태워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야기는 가해자의 가족과 가해집단의 생존자가 종교단체가 집단 생활을 하던 그 집에 하루를 묵게되면서 '거리'를 좁히게 되는 이야기다.
1995년에 일본을 발칵 뒤집었던 옴진리교의 지하철 가스살포 사건을 모티프로 했지만 아픈 사건을 극적으로 재연해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라 기억을 조심스럽게 소환해 오히려 사건 이후와 남은자들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옴진리교 사건은 일본 밖으로도 떠들썩했을 만큼 충격적이었으니 이 영화가 실제 사건으로 발화되었음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고, 영화 속 이들이 모인 이유를 아는 지점까지 오게 되면,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고, 그걸 위해서 밋밋할 수 있는 전개에 영화적 장치를 했을 뿐임을 알게 된다. (차가 사라지는 것, 음산한 숲속 집, 핸드헬드, 종교집단에서 탈출한 남자, 사건 후 이들이 받았던 경찰조사 플래시백 등)
덕분에 아주 긴장한 채로 볼 수 있게 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드러나게 되면 결국 말하고자 하는것에 영화적 구성이 중요한게 아님을 안다.
(범행자의 남동생이라던 아츠시의 정체가 밝혀지며, 초반에 가족사진 합성하던 장면과 꿰맞춰지는 극적 장치가 끝까지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밝기도 어둡기도 한 분위기를 넘나들지만 어느 경우에도 늘 죽음, 떠나보낸 사람들의 담담한 삶 속의 소용돌이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왔다. 죽은자에 대해 알기 위해선 남은자를 통할 수밖에.
사건이 있은 후의 경찰 조사 장면에서 제목 '디스턴스'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여선생은 남편이 언제부터 좀 이상했던것 같냐는 경찰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 마사루도 형에 관한 질문에 같이 살았지만 서로 관심이 없었다고 답한다. 미노루씨 역시 아내가 두번이나 낙태했다는걸 전혀 몰랐다. 탈출한 신도 역시 가족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미노루씨의 아내가 동지를 대동하고 나와앉아 그 곳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했고 해야할 일이 있다며 떠날 결심을 말하는 장면. 아내의 평안한 표정과 세속의 번민을 초월한 웃음, 테이블을 마주한 남편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넘을 수 없는 벽과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발견하는 순간은 정말 공포스럽다.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종교(말이 되는 종교는 없지.)에 세뇌 당하는것을 끔찍이 안타까워하는 불가지론자인 내겐 이보다 숨통을 죄어오는 장면도 드물다. 정말 괴로운 이야기다. (광신도 특유의 저 표정좀 봐ㅠ)
+ 덧
흠. 이번 세기 일본 감독중 최고 거장이 될 가능성이 단연 높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로만 써가려 했지만, '아사노 타다노부의 영화' 쪽으로 자리해 버리는걸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아사노는 조연일 뿐인데, 그 존재감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하다. 정말 괴물이다, 어휴;; 여러가지로 <환상의 빛>이 함께 떠오를 작품인데 아사노의 섬광같은 번쩍임도 한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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