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더라도 우디앨런 영화'인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는 우디 앨런이 자신을 대리할 배우를 내세워 찾아나선 도시 시리즈 중 최고다.
내게 우디 앨런의 영화는 그 자체가 관람 이유인지 오래이므로, 아무런 정보 없이 비오는 휴일 아침 극장을 찾았는데, 보는 내내 너무나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재미있어서 수십년간 싫어해온 비 마저, 술로 밤을 샌 젋은이들과 엉켜 축축하게 더러운 서울 도심마저 귀여울 정도였다.
2006년 <매치포인트>가 런던을 배경으로 삼았을 때, 사람들은 영화 자체보다 우디 앨런이 유럽으로 날아갔음에 더 주목했을 만큼, 웬만해선 뉴욕과 그 부근을 벗어나지 않던 그 였는데 이후 작품들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런던을 시작으로 드디어 다른 도시들 순례가 시작된거란 느낌이었고 그걸 확인해가는 과정도 팬들에겐 즐거움이자 개봉작을 챙겨보는 이유였다.
<스쿠프(07)>, <카산드라 드림(07)>을 런던에서,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09)>를 바르셀로나에서, <환상의 그대(11)>로 런던에 돌아왔다가 드디어 이 작품에선 공간배경 자체를 가장 주요한 소재로 삼아 아주 노골적으로 파리를 숭앙한다.
게다가 최근작 <투 로마 위드 러브>의 또 다시 노골적인 제목과 13년 예정작이 코펜하겐을 택한걸 확인하면, 새 작품을 만날 때마다 모든걸 떨치고 유럽으로 슝 날아가고픈 욕망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두려워질 지경이다. (서울을 사랑해보게 서울에도 한번만 와줘요ㅠ)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잘 나가는 ‘길 펜더(오웬 윌슨 분)’는 약혼녀 ‘이네즈’와 함께 장인의 사업차 방문에 묻어 여행겸 파리에 왔다. 길은 상업적인 시나리오 따윈 이제 그만 버리고 소설을 쓰고 있고 쭉 그렇게 살고 싶다.
이 아름답고 예술적인 도시에 묻혀 소설을 쓰며 살 수 있다면 할리우드의 성공과 저택 따위는 얼마든지 버리겠다는 길은, 결혼 반지는 역시 다이아몬드로 해야 뒷줄의 하객도 볼 수 있을거란 이네즈와는 완전히 다르다.
우파 장인과는 정치적으로 맞지 않다. 우연히 만난 이네즈의 친구 부부는 현학적인 잡지식과 오기로 뭉친 전형적인 가짜 지성(pseudo intellectual)들이다.
당연하게도 약혼녀는 이들과 어울리기를 즐거워 하고 겉도는 길을 답답해한다.
이렇듯, 진짜 하고픈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틀은 특별할 게 없다.
결별이 뻔히 보이는, 엄청나게 섹시하지만 가치관이 생판 달라 대화가 힘든 커플, 바람 날 가능성을 보이는 말 통하는 여자들 몇몇, 친구 커플과의 동행, 불륜 조짐, 천박하게 얕은 지식으로 포장한 가짜들, 그리고 그게 먹히는 사람들 등은 우디앨런 영화에서 낯설지 않은 배치다.
(다른게 있다면, 이번엔 주인공에게 그런 속물 지식인 캐릭터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점)
이런 식의 전개가 이어지다가 각자의 파트너와 바람이 나거나 말 통하는 파리 여인을 만나거나 할게 뻔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순간, 술에 취해 파리 뒷골목을 헤매던 길 앞에 클래식 푸조가 서고 그를 태워 20년대의 파리로 데려가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스콧 피츠제럴드를 시작으로 수많은 전설적인 작가들을 만나게 된다.
와우! 이런 얘기일줄은 몰랐다!
이렇다면 결말은 중요하지 않지. 매일 밤 길이 방문하는 그 과거에서 만날 위대한 예술가들로 누가 누가 나올지 기다리고, 그들과 어떤 가상의 얘기를 나눌지 기대하는 맛이면 되는 것.
세상에나,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콜 포터,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달리, 고갱, 드가, 마티즈, 만 레이, 루이스 부뉴엘, T.S. 엘리엇 등등이 하나씩 나와서 “헤밍웨이입니다!”하고 정확하게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그 동화 같은 사랑스러움에 전율이 일고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길은, 모딜리아니, 브라크 등의 연인이었다가 지금(?)은 헤밍웨이와 피카소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하는데, 매일밤 현실의 약혼녀를 두고 과거의 여인과의 그 은근한 러브스토리로 이어지던 이야기는 현실로 돌아와서는 20년대의 아드리아나가 환생한듯한 파리 여자와 새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결국, "어느 시대의 누구나 현재보다 과거를 미화하여 그리워하게 마련이니 현재에서도 삶의 맛을 찾아 잘 살자"는 그런 주제를 전달하는 장치로 아드리아나가 제대로 활용된 셈이다.
그 외에도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인물들과 작품들, "아는 만큼 보일것이다!"라며 이 영화 전체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길 스스로 바라게 되는 사랑스럽고도 얄궂은 영화다.
+ 위대한 예술가들로 분하는 배우들도 정말 즐거웠을것 같다. 단연, 코뿔소 장식의 지팡이를 들이밀며 등장하는 살바도르 달리의 아드리안 브로디가 최고였다.
+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루이스 부뉴엘에게 영화 힌트를 주는 장면도 얼마나 재치가 넘쳤는지. 그 작가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길은 부뉴엘에게 그의 실제 영화 <El angel exterminador>의 힌트를 주는 것으로 역사를 조물락거리는데, 부뉴엘은 천연덕스럽게도 "당최 왜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거냐!"며 의아해하고 길은 홀연히 가버린다.
(이 영화의 내용이 이러하다. 어느 저택에 방문한 사람들이 문이 닫혀있지 않는데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갇혀 나갈 수 없고 동물들이 쳐들어오는 내용이다)
+ 이 영화의 포스터도 아름답다. 시대가 맞지 않아 고흐는 등장하지 않는데도 그의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과 실사를 섞은 이미지를 써서 만들었다. 파리가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벨에포크(belle epoque) 시퀀스에서 등장했어도 됐을텐데.
+ 현실과 가상의 어딘가를 만진다는 점에서 우디앨런의 <젤리그>와 <카이로의 붉은장미>가 떠오르고, 노골적인 애정을 바치는 도시를 걸으며 대화하는 남녀는 역시 <맨하탄>을 떠올리게 하며,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까지. (고흐의 그림속으로 들어가 귀를 자른 후 붕대를 감은 고흐를 만나는 에피소드!!!)
+ 프랑스 영부인을 조연으로 만나는 맛도 있다. 사르코지와 결혼한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가 박물관의 유식한 가이드로 나온다.
+ 이건 다른 얘기인데, 전에 잠깐 알던 어느 미국인이 한국 사람들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점 중의 하나로 이것을 꼽았다. 비가 조금이라도 오면 지하철 역 입구에서 우산을 다 켤때까지 조금도 밖으로 나서지 않아서, 계단이 사람들로 꽉 막히는 것. “비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라 했다.
비를 너무나 싫어하다보니 그 대표적인 사람이 나였는데ㅋ <미드나잇 인 파리>가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그 생각마저 바뀔 지경이다.
마지막 장면.
길과 새로운 사랑으로 다가온 파리의 여인은 비오는 파리가 가장 아름답다며, 비 맞는 것이 정말 좋다며 폭우속을 다정히 그냥 걷는다.
나도 이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 곳이 파리라면, 그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말이다!
그 마지막 씬~!
+ 가사가 정말 사랑스러운 콜 포터(역할의 Yves Heck)의 <Let’s do it>을 들어보자.
'■ 영화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87~2002 : 최고의 흥행 배우, 최고의 키스신, 최고의 커플, 최고의 영화제작자, 최고의 헤어스타일 (0) | 2022.10.03 |
---|---|
1987~2002 : 최고의 SF영화, 최고의 드라마, 최고의 코미디, 최고의 느와르 영화 (1) | 2022.10.03 |
헐리우드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25편 : 14위~10위 (0) | 2022.10.03 |
1987~2002 : 최고의 액션영화, 최고의 공포영화, 최고의 영화감독, 최고의 로맨틱코메디 영화, 가장 과소평가된 남자배우 (0) | 2022.10.03 |
1987~2002 : 최고의 애니메이션, 최고의 로맨틱 영화,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 최고의 히어로 캐릭터, 가장 과소평가된 여배우 (1) | 2022.10.03 |
퀸(QUEEN)이 네명이라는 사실을 재발견하는 <퀸 락 몬트리올 씨네사운드 버전> (0) | 2022.10.03 |
1987~2002 : 영화속 최고의 반전, 최고의 악당 캐릭터, 영화속 가장 멋진 컴백, 최고의 하이틴 영화, 최고의 시리즈 영화 (0) | 2022.10.03 |
헐리우드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나리오 25편 : 19위~15위 (0) | 2022.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