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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영화를 무시했던 적이 분명히 있는데, 이유없이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한국영화에서 당연히 대사로 사용되는 한국말을 나도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보니 극중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들을 내가 평소에 말하는 우리말과 너무나 쉽게 비교해볼 수 있고, 그래서 특히 과한 문어체 대사들이 난무하는 한국말 영화는 너무나 오글오글대서 봐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것만이 기준이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 영화에 그런 영화들이 많다는 건데, 주로 진지한 수사물이나 처절한 전쟁영화가 그렇다. (한때 엄청나게 유행했던 조폭코메디들은 대사 때문이 아니라 그 외 다양한 이유로 우습게 여겼던 것이다.)

흥행했던 드라마 아이리스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노력했지만 민망해서 볼수가 없었다. 일단 그렇게 인형같이 생긴 인간들이 정보요원이라는것 부터가 감정이입율 제로이고, "아니 뭣이?" 류의 비현실적인 대사들도 그냥 넘겨봐지지가 않아서였다. 내러티브의 치밀함은 그 다음 문제이다. 일단 어색하고 웃기고 민망해서 쳐다봐줄 수가 없으니까. (내가 영어가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어나라 영화에 대한 판단도 달라질 수 있겠지, 물론.)

어쩌다 드라마 얘기가 나왔는데, 영화에선 그보다 더 하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말하자면 긴 얘기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이유들이 컸고, 내가 생각하기에 세련된 한국 영화가 기억에 남기 시작한 것은 정말로 그 역사가 짧다. 오히려 유현목 감독 시절의 60~70년대 영화에서 더 세련된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면 다들 대사를 실생활에서 말하듯 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공효진, 전도연, 송강호(<밀양>에서만), 아사노 타다노부... 이들이 그렇다.

잠시, 수년 전 아사노상의 방한 인터뷰 중, 이점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 하나.

질문 : 
여러 작품에서 굉장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아사노 : 배우를 목표로 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연극을 하는 배우들은 인사말 조차도 과장된 연기를 펼친다. 나는 우리가 평소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배우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웃음) 그래서 더더욱 우리가 평소에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를 신경써서 연기한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찍었던 <포커스>란 영화가 출연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다.

그래서! 연극은 도무지 그 대사 스타일에 적응이 안돼서 좋아하기를 포기했다. 감정과잉의 오버스러운 대사가 기본인 연극발성이 싫어서이고, 그래서 연극배우 출신 티가 남아있는 배우들도 불편하다. 아무튼, 내게 거의 충격이었던, 정말로 마음에 드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최고의 한국영화를 초스피드로 생각해보니 일곱 작품이 떠올라 기록해둔다. (순서는 정할 수 없다.)

<수취인 불명>

김기덕 /  양동근, 조재현, 방은진

한마디로, 나에게 가장 슬픈 영화로 남아있다. 김기덕 감독의 초기작이니 벌써 세월이 꽤 흘렀지만 슬픔이란게 뭘 말하는지 정말로 알 수 있을것 같은 영화로 기억돼 있다. 지금도, 포스터만 봐도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배우 양동근. 이 영화에 양동근이 아니었다면, 데뷔작부터 괴상한 영화만 만든 또라이 감독의 또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였을지도 모른다.  김기덕의 후작들에는 죄다 실망했지만 이 작품 만큼은.

결과적으로 더러운 인생을 살고 생을 마감한 김기덕.. 참 한심하다.  조재현도 마찬가지. 

<마더>

봉준호 / 김혜자, 원빈

그냥 뭐... 봉감독이 천재라는 생각과 '국민엄마'로 불리우지만 드라마에선 가끔 청승스런 연기가 불편하기도 했던 김혜자가 딱 알맞게 처절한 연기를 보여준 영화이다. 극장을 나서면서 계속 생각하게 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계속 더 세련되게 어려운 내러티브와, 그러면서도 온갖 상업적인 기술까지 다 기가막히게 구사하는 봉준호 감독의 내공이 느껴지는 영화다. "내게도 엄마가 있어서 이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거룩한 깨달음을 준 영화.
 
<올드보이>

박찬욱 /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영화에 대해선 더 말할 필요도 없겠고, 박찬욱 감독이 칸에서 타란티노에 의해 이름이 불렸을 때 100%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그 상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타란티노 감독이 올드보이 추종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 <파이란>과 함께 배우 최민식의 연기가 좋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딱 두개의 작품 중 하나이다. (최민식도 연극배우 출신이라 그런 과장된 대사법이 남아 있어 불편했던 적이 많다) 하악 구조 변경후의 특징 없는 강혜정을 볼때마다, <올드보이>의 '미도'를 떠올리며 안타깝게 그리워하게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밀양>

이창동 / 전도연, 송강호

순서는 정하기 어렵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겠다고 했지만, 쓰다 보니 이 영화를 1위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이 영화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감상평들을, 정말로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전도연과 송강호 모두 최고로 자연스러운 연기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관한 우스운 문제들을 스토리 전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녹여 넣어 놓고 아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짚어준 것이 너무너무나 좋았다. 물론,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를 비하한 것이 아니라고 당당히 말했다. 감독님 멋집니다!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 송강호, 배두나, 신하균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기 전에 이 영화를 먼저 봤으니 그 충격이 오죽했을까. 그것도, 새벽 4시쯤에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면서 허름한 비디오방에서 봤으니까 말이다. "이 감독 대체 누구냐!"하는 생각 뿐이었던, 그야말로 충격 자체였던 작품이다. 가해자도 불쌍하고 피해자도 불쌍한,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돼버린, 양쪽다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관객을 몰아넣는 잔혹한 감독님이시다.
 
<멋진 하루>

이윤기 / 전도연, 하정우

위에 나열한 영화들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큰 기대 없이 봤다가  상당히 동화됐던 작품이다.
내가 그로테스크한 고어 영화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고 말이다. ㅎ
배우 하정우는 <두번째 사랑>이라는 작품에서 참으로 좋았다.
그 이후에 큰 영화들을 너무 많이 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빨리 싫증났긴 하지만 말이다.

<안개마을>

임권택 / 정윤희, 안성기

이 영화는, "제대로 보고 싶어 죽겠는 영화"이다. 이문열의 단편소설인 <익명의 섬>이 이 영화의 원작인데 리모컨으로 채널 돌리다가 잠깐 걸린 케이블 채널에서 마지막 장면을 잠깐 본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어찌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마지막 장면에서의 배우 안성기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며칠을 갔을 정도다. 다행히, 한국 영상 자료원에 필름이 있고, 마침 올해에 몇달에 걸쳐 '한국영화100선'으로 꼽힌 작품들을 몇 개씩 묶어 상영하는 계획이 잡혔고 이 영화 <안개마을>이 포함되어있다.
이렇게 조만간 필름으로 보기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다.
(옛날 개봉 당시의 영화 포스터 카피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웃기군!)
작가 이문열이, 타락한 지식인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그의 '허구'를 그리는 글솜씨 하나는 탁월하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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